수선의뢰 및 상담

소 뒷걸음치다 사자를 잡다 - 뤼첸 전투

작성자: 오영수
작성일시: 작성일2019-04-13 06:17:55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와 키르홀름 전투

https://www.fmkorea.com/1711738999 


 폴란드-오스만 전쟁, 코침 전투

https://www.fmkorea.com/1714300271


윙드 훗사르의 몰락, 구스타프 아돌프의 등장

https://www.fmkorea.com/1716616846


북방의 사자와 브라이텐펠트 전투

https://www.fmkorea.com/17190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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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1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충격에 빠졌다.

13년의 길었던 전쟁을 끝내고 신교도를 쓸어버릴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갑자기 저 먼 스웨덴 촌동네에서 구스타프 아돌프란 미친놈이 나타나

브라이텐펠트에서 자신의 군대를 싹 쓸어버린 것이다!



반대로 신교도들에게 구스타프 아돌프는 축복과도 같았다.

13년만에 첫 승리를 거둔 데다가,

제국군의 에이스 틸리 백작에게 치명타를 먹인 것이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신교도의 패색이 짙었던 30년 전쟁을 비빈 것으로 모자라, 

신교도측에게 유리하게 만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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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이 지고 있는데 웃고 있어요!



북방의 사자 구스타프 아돌프는 작센에서 1631년 겨울을 보낸 뒤, 

1632년 봄이 되자 바바리아(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를 향해 남하했다.


틸리는 도나우 강의 지류인 레흐(Lech)강의 다리를 모두 끊고, 남아있는 유일한 도하점에서 구스타프를 막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구스타프는 짚더미를 태워 연기를 만들어 제국군의 시야를 가리고,

뗏목을 만들어 소수의 기병과 보병을 3km 떨어진 곳에서 몰래 도하시킨 뒤

대포를 동반한 양면 공격으로 제국군을 격퇴하고 강을 도하했다.

틸리 백작은 스웨덴 대포에 넓적다리를 직격당했고, 근처 잉골슈타트(Ingolstadt)로 후송되었지만 곧이어 사망했다.

평생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장수가 한 사람에게 두번 패배해 사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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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흐 강 전투(Battle of the Lech)



제국군의 저항을 분쇄한 구스타프 아돌프는 거침없이 바바리아로 진군했다.

1632년 5월 바바리아의 중심지 뮌헨이 항복했고

스웨덴군은 바바리아 공작의 궁전(Residenz)를 약탈해 군자금과 물자를 보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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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뮌헨 레지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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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전경. 저 뒤로 알프스 산맥이 보인다



뮌헨에서 황제가 기거하는 오스트리아는 그야말로 지척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페르디난트 2세는 자신이 홀대했던 발렌슈타인(Wallenstein)을 부를 수 밖에 없었다.

발렌슈타인은 어마어마한 군자금으로 순식간에 4만에 달하는 군대를 끌어모아 바바리아로 진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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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흐트 폰 발렌슈타인



발렌슈타인은 구교도와 신교도 모두에게 안티를 보유한 어그로꾼이었지만,

눈치와 실력 하나는 끝내주는 인물이었다. 

그는 무한도전의 노홍철 같은 똑똑한 미친놈이었고

강력한 화력의 스웨덴 군을 상대로 야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스웨덴군의 약점을 집요하게 팔 생각이었다.


발렌슈타인은 뮌헨 근교의 알테 베스테(Alte Veste)요새에 사령부를 두고 지독한 청야 전술을 구사했다.

구스타프 아돌프의 10만이 넘는 병력은 막대한 군수물자를 요구했고,

바로 옆 보헤미아에 군수공장이 있는 발렌슈타인에 비해 보급 거리도 두 배 이상이었다.

참다 못한 구스타프는 알테 베스테를 공격하지만 2,400명의 사상자를 내며 후퇴한다.

더군다나 그의 왼팔 요한 바네르(Johan Baner)가 부상당하고 포병대장 레나르트 토르스텐손(Lennart Torstensson)이 포로로 잡히며

병력 손실 이상의 손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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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테 베스테 전투(1632년 9월)



발렌슈타인은 바바리아를 포기하고 작센으로 진군하는 전략적인 기동으로 구스타프의 허를 한번 더 찌른다.

작센은 북독일의 항구들과 스웨덴군을 연결하는 보급선의 중심이었고,

작센을 먹히는 순간 구스타프 아돌프는 독일 한복판에서 아사할 위기에 놓이게 될 것이었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소집해 바이에른에서 후퇴했으며,

하루 40km의 강행군을 벌이며 작센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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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의 현재 모습



먼저 작센에 도착한 발렌슈타인은 11월 14일 큰 실수를 범한다.

그는 제국군 최고의 기병대장인 부관 파펜하임(Pappenheim)에게 5천의 병력을 주어 할레(Halle)로 보내고

자신은 1만 7천(보병 1만, 기병 7천)의 본대와 함께 라이프치히로 행군에 겨울을 날 작정이었다.


하지만 독이 오를 대로 오른 구스타프 아돌프는 이대로 겨울을 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강행군을 통해 발렌슈타인의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위치에 도달했고,

11월 15일 본대를 이끌고 발렌슈타인을 기습하려 행군했다.

그는 겨울이 되기 전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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쒸익...쒸익...



하지만, 하늘이 발렌슈타인을 도왔다.

발렌슈타인의 분견대가 스웨덴 군을 발견했던 것이다.

스웨덴군은 소규모 제국군을 격파했지만, 길이 진흙탕이었던 탓에 발렌슈타인에게 제 때 도착하지 못했다.

스웨덴 군은 진흙탕 위에서 야영하며 다음 날 있을 전투를 준비했다.



전령의 급보를 들은 발렌슈타인은 파펜하임에게 최대한 빨리 합류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는 뤼첸(Lutzen) 마을에 진을 치고 밤 사이 수비 대형을 갖췄다.

발렌슈타인의 병력은 실개천 뒤 완만한 언덕에 포진했고,

전진하는 보병과 기병을 막기 위해 머스켓 병을 위한 참호를 파고 스웨덴 군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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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슈타인이 파펜하임에게 보낸 편지.

"그냥 다 포기하고 최대한 빨리 튀어와" 라는 내용이다.

편지가 파펜하임의 피에 젖은 걸 확인할 수 있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11월 16일 오전 9시, 안개가 뒤덮인 뤼첸 마을에서 발렌슈타인과 조우했다.

작센-바이마르 공작 베른하르트(Bernhard)가 좌익

도도 폰 크니프하우젠(Dodo von Knyphausen)이 중앙을 맡았다.

구스타프 아돌프 자신은 스웨덴 기병대와 함께 우익에 자리했다.


발렌슈타인은 스웨덴군 왼편 마을에 불을 질러 전장을 한정짓고 스웨덴군의 돌격을 기다렸다.

제국군 방어의 핵심은 중앙과 우익 사이 풍차가 위치한 언덕이었는데,

발렌슈타인은 24문의 대포 중 13문을 이 언덕에 배치하고 이곳에 사령부를 차렸다.


안개가 걷힌 11시, 스웨덴군의 공격으로 뤼첸 전투가 시작되었다.


스웨덴 군 19,000 : 보병 12,800 / 기병 6,200 / 대포 60문

제국군 17,000 : 보병 10,000 / 기병 7,000 / 대포 24문



소 뒷걸음치다 사자를 잡다 - 뤼첸 전투

뤼첸 전투 초반 배치도. 위가 구스타프 아돌프, 아래가 발렌슈타인의 병력이다.



스웨덴군은 제국군의 빽빽한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실개천과 참호는 스웨덴군 돌격에 큰 장애물이 되었으며, 

스웨덴군이 빠른 행군을 위해 대포 상당수를 포기한 덕에 생각보다 화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스웨덴군이 돌파할 유일한 포인트는 제국군 좌익이었다. 

3,000의 스웨덴 기병대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4,500의 제국 기병을 압도했으며,

제국군 중앙과 좌익을 지휘하는 선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바로 이 순간이 발렌슈타인 최고의 위기였다.

중앙과 좌익이 끊어지는 순간 제국군은 좌측에서부터 포위되어 전멸할 위기였던 것이다.


이 때, 제국군 좌익에서 나팔 소리가 울려퍼졌다.

파펜하임이 3,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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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남자 고트프리트 본 파펜하임.

그는 30년 전쟁 마초의 끝판왕이었다. 그의 시신은 큰 상처 7개, 작은 상처는 100개가 넘었다고 한다.



전날 자정 발렌슈타인의 급보를 받은 파펜하임은 편지를 받은 그 순간부터 뤼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파펜하임은 창의력이나 깊은 사고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지만, 거침없고 무자비한 돌격은 제국군 최고를 자랑했다.

열 두 시간이 넘는 행군 끝에 전장에 도착한 파펜하임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그가 가장 잘 하는 것을 시작했다.

파펜하임의 미친 돌격이 스웨덴 군 2열을 강타했고, 스웨덴 군 우익의 기병대가 붕괴된다.

스웨덴 군 우익이 후퇴했지만, 정작 파펜하임은 무사하지 못했다.

파펜하임은 스웨덴 포도탄(Grapeshot)을 온 몸으로 두들겨맞았고, 전장 뒤로 후송하는 사이 목숨을 잃었다.


스웨덴군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중앙 지휘관 크니프하우젠은 겨우겨우 후퇴한 스웨덴군 보병대를 재편하는 중이었고,

제국군 기병대가 스웨덴군 보병대를 포위할 위기에 처했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우익에 쏟아져 들어오는 제국군 기병대를 막아야 했고,

가장 가까운 두 기병 연대의 지휘권을 인수해 지휘했다.

하지만 두 연대장이 모두 부상으로 지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구스타프 아돌프는 자신이 직접 지휘하기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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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아돌프의 버프 코트



구스타프 아돌프는 전장을 눈으로 보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그 습관 때문에 1627년 디르샤우에서 총을 맞았고, 1632년에는 자신이 탄 말이 대포에 직격당하기도 하지만

절대로 자신의 습관을 포기하지 않았다.

의료진이 디르샤우에서 맞은 총탄을 빼낼 수 없었고, 총알이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에 구스타프 아돌프는 갑옷을 입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갑옷 대신 두꺼운 버프 코트를 입고 전장에 참여했고,

이 날도 셔츠 3장에 노란색 버프 코트를 입고 기병을 지휘했다.


뤼첸 전투는 정말 혼란스러운 격전이었다.

머스킷과 대포에서 나오는 포연과 발렌슈타인이 불을 지른 마을에서 나는 연기, 거기다 옅은 안개까지 더해져

양 군은 제대로 시야를 확보할 수 없었다.

구스타프 아돌프가 뛰어든 우익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으며, 첫 번째 총알이 구스타프의 왼쪽 팔을 관통한다.

심각한 근시인 구스타프는 후퇴를 거부하고 힘겹게 말을 조종하지만, 연대의 주력에서 떨어져 나왔다.

제국 기병대는 홀로 떨어진 스웨덴 왕을 급습했고, 총탄이 구스타프 아돌프의 오른쪽 폐를 관통한다.

다음 총탄이 구스타프 아돌프의 말을 죽였고, 낙마한 구스타프 아돌프는 제국군 칼에 세 차례 찔려 사망한다.


구스타프 아돌프의 죽음은 여러 버전이 전해 내려오는데,

한 버전에서 구스타프 아돌프는 겨우 살아남아 땅에 쓰러져 있었다.

누구냐고 묻는 제국군에게 그는 스웨덴의 왕이라 대답했고, 머리에 총을 맞아 죽었다.


어쨋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북방의 사자 구스타프 아돌프사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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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아돌프의 죽음



구스타프 아돌프는 죽었지만, 스웨덴군이 재편할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스웨덴 군 전체가 구스타프 아돌프의 죽음을 알게 되자, 반전이 일어났다.

스웨덴군의 멘탈이 붕괴하긴 커녕, 왕의 죽음에 격노해 전투력이 급상승한 것이다.


집단 광기에 휩싸인 스웨덴군은 발렌슈타인을 향해 돌격했다.

보병과 기병 돌격으로 어떻게 스웨덴군을 막던 제국군도 마지막 공격을 버틸 수 없었고,

끝내 풍차 언덕이 스웨덴군 손에 떨어진다.

탈취당한 제국군의 중포는 방향을 바꿔 제국군을 겨냥했으며,

지친 제국군의 마지막 기병 돌격은 너무나 쉽게 격퇴되었다.

발렌슈타인은 승리의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때마침 도착한 파펜하임의 2,000 보병에게 후미를 맡긴 후 라이프치히로 후퇴한다.


전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양 군은 너무나 지쳐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었다.

풍차 언덕의 주인이 6번이나 바뀐 격전이었으며, 양 군의 사상자는 6,000명으로 비슷했다.

피투성이가 된 구스타프 아돌프의 시체는 전투가 끝난 후에야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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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첸 전투 모식도.



뤼첸 전투는 스웨덴 군의 전술적, 전략적 승리였다.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제국군의 진지를 점령했고, 발렌슈타인도 작센을 포기하고 보헤미아로 후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스타프 아돌프의 죽음은 정말 큰 숙제였다.

그 누구도 북방의 사자를 대체할 수 없었다.


한편, 발렌슈타인 또한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그는 급한 불은 끄는 데 성공했지만, 페르디난트 2세와 제후들은 발렌슈타인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1633년 발렌슈타인의 소극적인 움직임도 황제의 신뢰를 잃는 데 한 몪 했다.


황제의 신뢰를 잃은 발렌슈타인은 제국 반역자로 규정되었다.

발렌슈타인은 어떻게든 살려고 신교도 쪽에 붙으려 시도했지만

휘하 장교들에게 1634년 2월 25일 에게르(Eger)에서 암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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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슈타인의 암살



틸리, 구스타프 아돌프, 발렌슈타인이 30년 전쟁에서 모두 퇴장했다.

하지만 스웨덴과 제국 모두 큰 고민을 안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전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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