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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시대 제 4 세력?

작성자: evcQF642
작성일시: 작성일2020-07-26 18:37:03   

image.png 후삼국 시대 제 4 세력?

한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대 중 하나로 꼽히는 후삼국 시대


이번 글에서는 그 후삼국 시대 왕건과 견훤 그리고 신라의 틈바구니 속에 나름의 독자세력을 구축했던 호족에 대해 소개해보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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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927년


이때 고려와 후백제는 경상남도 남해안에서 맞부딪치기 시작하였는데,


왕건은 선수를 쳐서 소백산맥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문경을 빼앗었고 경상 서부 지역을 장악하여 신라에 대한 견훤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려 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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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려가 장군을 부르며 기세를 올렸지만,


견훤 또한 웅대한 책략을 가슴에 숨기며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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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는 최승우의 전략으로 묘사되는 서라벌 진공과 공산 전투에 이르기까지의 일이 벌어졌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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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927년은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격동의 시기로 뽑을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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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시기 강주 땅에서는 한 남자가 자신의 운명을 준비하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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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인공은 바로 권지강주사 겸 회화장군 왕봉규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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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봉규 그는 누구인가?


물론 난세였던 신라 말기 숱한 자칭 장군들이 있었지만,


이 왕봉규의 직함들은 본인이 자칭한 것이 아니라,


당시 중원의 패권국 이었던 후당왕조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라는데 그 의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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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중원왕조로부터의 책봉과 조공은,


'정통성'에 기반이 되는 동시에 하고 싶다고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왕봉규가 당시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던 이존욱의 후당과 공식적으로 이러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놀라운 일 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그가 매우 탁월한 외교적 식견을 가진 국제적인 인물이었으며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소유했던 인물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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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왕봉규는 924년 최초로 후당에 조공하여 '천주절도사'로 책봉 받았는데,


천주는 오늘날 경상남도 의령을 말하며,


절도사는 당나라 때부터 오대(五代)에 걸쳐 지방에 할거하면서 독립된 세력을 갖춘 군벌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이는 후당 왕조가 한반도 세력들 중 거 왕봉규를 거의 국가에 준하는 세력으로 인정한 것을 의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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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7년 왕봉규는 후당에 두번째 조공을 행하는데,


이때 권지강주사와 회화장군의 직함 또한 받은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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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는 신라 9주 5소경 중에 하나로 옛 가야지방에 해당하는 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왕봉규가 명실상부한 옛 가야 지방의 패권자로서


인정받은 것이며,


왕건과 견훤이 패권을 다투던 시기 한반도의 제 4세력으로서 그 존재감을 들어낸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꺼야


*이러한 왕봉규의 국제적 존재감은 신라가 대중국외교를 행할 때 왕봉규의 힘을 빌려야 했던 것에서 더욱 극적으로 들어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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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렇게 중원왕조에까지 그 존재감을 인정받았던 왕봉규는 927년 이후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마는데,


결국 그도 서라벌의 함락, 공산전투 등의 대사건이 벌어졌던 927년의 풍운을 넘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인물이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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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왕봉규의 운명을 끝장낸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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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는 우선 견훤이 많이 지목 되었는데,


견훤은 기습전에 능한 인물이었고,


또한 927년 왕봉규의 영역이었던 강주가 후백제에게 점령되어,


멸망할때까지 후백제의 영토로 이어졌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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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근 학계에서 보다 더 유력시되는 용의자는 왕건으로서,


왕봉규의 세력의 급속히 커진데는 그가 고려에 귀부하여 그 아들을 왕건에게 인질로 보냈던 친고려파 호족 윤웅을 제압함으로서 강주 전역을 자신의 세력권에 넣었던 것이 그 결정적인 계기 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왕건의 입장에서는 왕봉규가 눈에 가시였을 가능성이 크고,


왕봉규 또한 이를 의삭하여 정통성을 가진 신라왕을 섬기면서도(신라왕에 대한 '존왕'의 예는 왕건과 견훤 또한 굉장히 의식하였어) 후백제와도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를 받으며,


무엇보다 927년의 정황에 있어서 남진한 고려군은 강주 관래내의 전이산과 노포, 평서산, 돌산 등을 속속들이 점령하였기 때문이야


결국 왕봉규의 운명 또한 이때 그 끝을 맺었으며,


그 이후 왕건이 공산에서 견훤에게 크게 패해 빤스런을 하면서 강주 전역이 자연스럽게 후백제의 영역으로 포함되었다는 것이 보다 더 부드러운 해석인 듯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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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수많은 군웅들이 일어났던 후삼국 시대,


<삼국사기>는 물론 중국측 사서인 <신오대사>, <오대회요>, <책부원귀> 등에도 기록되어,


결코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드러내고 한시대를 살다간 인물


왕봉규에 대한 소개를 마칠게


*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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